• youngmiyou

<객원글> 결혼기념일 산행

결혼기념일!

남들은 이런 날 호텔 식당에서 우아하게 브런치를 한다는데

우리는?

일박 이일, 산에 가기로 했다.

작년에도 계획했지만 날씨가 받쳐주지 않아 수포로 돌아갔었다.

이번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날씨 앱을 보며 한숨을 쉬다 날씨가 바뀌면 다시 희망을 갖기를 수십 번.

비가 조금 내리는 것은 괜찮지만 천둥 번개는 산에서 위험하다며 아무래도 올해도 힘들 것 같다고 포기하려는 남편에게 말했다.

스위스 전역을 뒤져 천둥번개가 없는 산을 알아보자고.

전면적 포기 말고 대안을 강구하자고.

나의 진지함과 단호함에 놀란 남편, 긴장하며 여러 루트와 날씨를 체크했다.


그래서 최종 선택된 곳은 샌티스 매스머 산장 (Säntis Mesmer Hütte).

그곳에서 일박하고 다음날은 내키는 대로 가는 것이 일정.

바서라우엔 (Wasserauen)에 도착하여 걷는데 아스팔트와 자갈길이 이어졌다.

태양은 뜨겁고 배낭은 무거웠다.

지루하고 재미없고 더운 길이 끝나자 이번에는 90도에 가까운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그늘은 없었다.

셔츠는 짜면 물이 나올 정도로 흠뻑 젖었다.


전생에 산양이었음이 분명한 남편은 내 배낭의 두 배를 짊어지고도

한치의 동요 없이 오르막길을 올랐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내가 우등생인데

남편과 함께 오면 나는 지진아다.

남편은 내 앞, 저 멀리서 걷고 있다 내가 안 보이면 기다렸다 다시 출발했다.

그래봤자 곧 거리는 벌어지고 말지만.

자기 속도대로 걷는 것이 편하다.

빨리 못 걷는다고 잔소리하거나, 나란히 안 걷는다고 야속해 할 필요도 없다.

같은 길 위에서 같은 목표를 향해 가면 된다.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배낭 때문에 뒤로 넘어질 것 같이 가파른 길을 한참 올랐더니

드디어 당나귀들이 호스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다투고 있는 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말이라 예약 가능한 방이 도미터리룸 (다인실) 밖에 없었는데

주인이 2인용 방 예약이 취소되었다면서 우리에게 원하면 써도 된다고 했다.

살다 보면 이렇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오는 법이다.

화장실도 방안에 있고 창문을 열면 하얀 염소들이 알프스를 배경으로 뛰노는,

그림 같은 풍경이 보이는 너무나 아늑한 방이었다.

우리가 방에서 짐을 풀자마자 우르릉 꽝꽝.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시작되었다.

푹신푹신한 침대에 걸쳐 앉아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비는 그저 남의 일이다.

아직도 길 위에서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을 걱정하기에 나는 너무 쾌적했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니 콧노래마저 나왔다.


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자 갰다.

오늘의 화창한 날씨는 타국에서 이상한 남자와 사느라 수고했다고

하늘이 나에게 내리는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상한 남자는, 더 이상한 여자에게 큰 소리 한번 내지 않은

자신의 성품에 하늘이 감동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다시 짐을 챙겨 7시에 출발.

산은 넓고 등산 루트는 많았다.

눈이 쌓인 곳이 있었는데 빙하처럼 보이기도 했다.

삐끗해서 저 갈라진 틈으로 빠지면 끝장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심조심 집중하며 걸었다.

날씨도 오락가락했다.

비가 내려 우비를 꺼내 입으면 금세 햇볕이 나오기도 했고

바람이 불어 추운가 하면 어느새 땀이 나기도 했다.

두 시간쯤 걸어 올라와 날씨가 하 수상하니 이제 내려가자 하며 조금 걷다가

내가 Stop!!! 을 외쳤다.

샌티스 정상에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다시 발길을 돌려 올라갔다.


산을 다니다 보면 욕심이 생긴다.

정상을 찍고 싶은 것과 왔던 길 말고 다른 길로 내려가고 싶은 것.

이 욕심에 사로잡혀 이 날 결국 쉬는 시간 빼고 9시간 동안 걸었다.

하늘도 욕심 많은 자에게는 아무리 결혼기념일이라도 베풀 자비가 없다는 듯

마지막 두 시간 동안 우박을 동반한 비를 대차게 뿌려 주셨다.

옆에서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들리는데

숲길을 걷고 또 걸었다.

혹시 등산용 스틱이 번개에 맞을까 봐 접어서 수평으로 들었다.


다음날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 일요일 샌티스 지역 염소와 소들 번개 맞아

- 샌티스 지역 등산하던 한 여성, 등산 스틱에 번개 맞아 사망

하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구나.

우박이 팔뚝을 때릴 때 아팠던 것이 별건가,

젖은 등산화 속의 불어 터진 발이 대순가,

천둥번개가 치던 밤 엄마 아빠가 걱정되어 잠을 설쳤다는 아이는

내 옆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다.

16주년 결혼기념일.

이 정도면 괜찮다.

또 살아보자.


*** 이 글은 객원 최경아님의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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