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oungmiyou

<객원글> 김은진-토텐탄츠 Totentanz

1월 6일 업데이트됨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친구에게 소포를 부치기 위해 주소를 물었다.

Obstgartenstrasse 라고 한다. 친구는 내 주소도 물었다. Totentanz. 그녀는 예전의 과수원 길에, 나는 예전의 공동묘지 옆에 산다. 그녀가 말했다. 차라리 Friedhof 라고 하지, 이름이 너무 노골적이야. 하긴 묘지를 뜻하는 `Friedhof`는 말 그대로 풀이하면 `안식처`이지만 `Totentanz` 는 `춤추는 죽음`, `죽음의춤`쯤으로 읽힌다. 내가 사는 건물은 바젤을 가로지르는 라인강을 면하고 있고 거리 쪽으로는 조그마한 공원을 마주하고 있다. 건너편에는 13세기에 지어진 쁘레디게르 성당(Predigerkirche)이 있는데 이 공원은 성당 내의 공동묘지였다. `Totentanz` 라는 주소명은 공원이 시작해서 끝나는 90여 미터의 거리에 있는 700년 가량된 건물 몇 채가 전부다. 이 성당은 처음엔 도미니코 수도원 소속이었는데 지금은 바젤 카톨릭 교구에서 운영하고 있다. 1440년 경에 알려지지 않은 어느 화가가 이 수도원 묘지의 벽 안쪽에 `토텐탄츠Totentanz`그림를 그렸다. 60미터 길이와 20미터 높이의 벽에 인체의 크기로 그려진 이 프레스코 화는 1805년 벽을 허무는 과정에서 부서졌다.



1805, 묘지의 벽을 부수고 있다. Historisches Museum Basel


당시 그림의 높은 예술적 가치를 안 몇몇 예술 애호가들이 그림 조각을 모아서 발퓌세르성당(Barfüsserkirche)에 가져다 놓았다. 발퓌세르 성당은 지금은 바젤 역사박물관으로 바뀌었으며 이 그림들은 예배당에 전시되어 있다. 37개의 춤추는 커플의 행렬은 황제와 교황, 귀족부인과 군인, 요리사와 거지에 이르기까지 중세 시대의 모든 계급과 연령대를 포함하고 있다. 각각의 커플은 서로 짧은 시적인 대화를 나눈다.


바젤 토텐탄츠 수채화 카피,1806, 요한 루돌프 페예르아벤트(Johann Rudolf Feyerabend) 그림 출처: Basler Totentanz. Wikipedia


죽음과 상인 Historisches Museum Basel 그림 출처: Basler Totentanz. Wikipedia

죽음:

“상인이여, 그만 광고를 멈추게. 시간이 다 되었어. 이제 가야만 하네.

죽음은 그대의 재화를 전혀 가져가지 않네. 그러니 그저 용감하게 이리로 와 나와 함께 춤을 추게나”

상인:

나는 평생 정말 열심히 일했네. 내 곶간은 재화로 가득찼네.

그런데 죽음은 내가 가진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내 육체와 삶을 가져가는구나”


1977년에는 Totentanz 17번지 지하에 `카타콤((Katakombe지하묘지)``이라는 디스코텍이 문을 열어 당시 동성애자들의 아지트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쉽게도 그 디스코텍을 방문할 기회는 없었지만, 운이 좋은 나는 다른 전시를 볼 기회가 있었다. 2013년 11월 한달 동안 영국 예술가 피터 그린어웨이가 `죽음의 춤(the dance of death)`이라는 주제로 이곳에 설치작업을 전시했다. 쁘레디게르 성당에서 열린 오프닝에서 그는 전 유럽에 걸친 이 전통적인 주제를 유서 깊은 바젤에서 전시하게 되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미술을 전공한 그는 최첨단의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서 주제를 재현했다. 마이클 잭슨부터 데미안 허스트까지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러했다. 공원에 수십개의 묘비가 세워지고 각각의 묘비에서 다양한 비디오가 흘러나왔다. 여러 단막극부터 모션그라픽 에니메이션, 실사와 그림이 중첩된 이미지 등 하나같이 인상적이고 예술적 완성도가 너무나 높았다. 해가 저물고 으스스한 날씨에 공동묘지의 묘비에서 살아나와 춤추는 죽음을 보았다.










2016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위스 예술가인 Gerda Steiner와 Jörg Lenzlinger가 10월 29일부터 11월 13일까지 이 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전시를 했다. 밤마다 나는 침실의 창문을 통해 죽음의 놀이동산으로 변한 공원을 보았다. 홈트레이닝 자전거 페달을 밞으면 커다란 해골 뼈다귀가 이리저리 춤을 추고 이 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거대한 죽음의 그림자가 밤이면 밤마다 거리를 휘저었다. 여러 장의 저승티켓을 사서 공원에 들어서면 그곳엔 다양한 볼거리와 놀이거리가 있었다. 저승티켓을 하나 내고 준비된 관에 누우면 관 뚜껑이 닫히고 땅 속으로 세차게 미끄러져 들어간다. 완벽한 어둠, 어디 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다양한 벌레소리가 들려오고 서서히 빛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꿈틀거리는 땅속 생명들. 작가는 땅속과 땅위의 미세한 생명들을 3차원의 강렬하고 아름다운 비디오 작업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것은 마치 깊은 한밤에 땅 속 혹은 풀 숲에 누워있는 내게로 거대한 대자연이 다가오는 체험이었다. 황홀했다.


Totentanz는 중세 말, 르네상스를 거쳐 낭만주의 시대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던 주제다. 음악과 문학 그리고 미술 전반에서 사랑은 받았으며 바젤은 이 토텐탄츠의 발원지로 여겨진다. 미술에서는 목판화, 유화, 에칭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13,14세기 유럽은 페스트로 인해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었다. 이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노래하기 시작했다. 왕도 교황도 기사도 처녀도 모두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다고. 이 죽음은 늙고 병들어 서서히 맞게 되는 죽음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이다. 저 위 그림을 자세히 보자. 왕과 춤추는 죽음, 교황과 춤추는 죽음, 기사와 춤추는 죽음, 젊은 귀족부인과 춤추는 죽음… 죽음은 발랄하게 춤을 추자고 손을 잡지만 그의 손에 이끌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돌려 그를 외면한다. 언제 닥칠 지 모르는, 어디에나 있는,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죽음,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 그림은 묘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의 연약함과 인간 삶의 유한함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부, 아름다움, 권력과 같은 세상의 가치를 무시하라고권고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세계가 공황 상태이다. 죽음이 다시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영국의 총리는 춤을 추다가 그 손을 겨우 놓았다. 한국의 김기덕 감독은 함께 신나게 춤을 추었나 보다. 봄과 여름 내내 공원 옆 쁘레디게르 성당은 코로나 테스트 검사장으로 이용되었다. 아침이면 검사를 받기 위해 정문부터 사람들의 긴 행렬이 이어졌다. 코로나 검사장으로 이보다 유서깊게 안성맞춤인 장소가 있을까? 서양에서는 죽음을 아주 무시무시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중세 기독교적 직선적 세계관에서 죽음은 끝이고 그 다음은 심판이 있다. 천당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성경대로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기에 죽음은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동양의 세계관은 다르다. 우리는 윤회를 믿는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불교의 연기법에 따라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죽음을 `돌아갔다`라고 표현하고 장례는 가장 성대한 인생의 행사이다. 20-21세기에 죽음은 스페인독감, 홍콩독감, 사스, 메르스,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 등으로 다시 한번 인간에게 손을 내민다. 죽음은 마치 공기 속에 있는 듯하다. 그런데 우리는 공기를 함께 사용한다. 나는 내 방안의 공기만을 마실 수 없다. 불교의 연기법에 따르면 존재와 세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마치 우리가 공기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내가 내쉰 공기는 당신에게 간다. 그리고 당신이 내쉰 공기를 나는 마신다. 우리와 바이러스는 연결되어 있다.


티벳 불교는 몇 천년 동안 윤회를 연구했다. 어떤 분야든 그렇게 오랜 세월 연구를 했다면 나는 믿는다. <티벳 사자의 서>는 죽은 자가 49일 동안 겪게 되는 일을 다루고 있다. 책은 그 기간 동안 망자가 만나게 되는 현상에 대해 설명해 주고 그것에 대처하는 방법을 일러준다. 죽은 영혼이 니르바나로 가거나 의식의 진화를 위한 조건을 잘 선택해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지 없는 지는 죽기 전까지 의식의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는 울었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기뻐하고 즐거워 하였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나는 웃었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슬피 울고 괴로워 했다.” 달라이 라마는 말한다. `죽음은 옷을 벗는 것이다. 그것은 exciting하다`


이제 토텐탄츠 그림을 다시 보니 저 해골은 내 영혼의 실체요 함께 억지 춤을 추고 있는 모든 신분과 계급은 그저 입고 있는 옷으로 느껴진다. 옷을 벗은 영혼이 죽음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이제 죽음이 왜 춤을 추는지도 이해가 된다. 왜 웃고 있는지도. 옷을 벗었으니 얼마나 홀가분하고 기쁘단 말인가. 나도 웃으며 흥미진진하게 호기심에 차서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기억하라. 나는 이말을 기억하고 싶지는 않지만

바도 모리 (vado mori) :죽음은 확실하다. 이 말은 확실하게 좋다.

저번 글에 언급한 그 미학자가 1997년에 <춤추는 죽음>이라는 책을 냈다. 서양 미술에 나타난 죽음의 미학` 이라는 부제가 설명해 주듯이 그 책 속에는 그로테스크하고 아름다운 다양한 그림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당시 나는 독일에서 갓 돌아온 그의 여러 책을 읽고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하는 강의도 들으러 다녔다. 책에 나온 그림 중에서 인생무상을 담은 vanitas 그림들에 매료되고, 괴상하고 투박한 토.텐.탄.츠.라는 이름을 좋아했었는데 그 이름에서 이렇게 살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내 마음이 나를 이끈 것일까? 이것이 마음의 연기법인가?


내 방 창밖으로 보이는 토텐탄츠 공원과 성당

이 글은 바젤에서 활동하는 화가 김은진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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