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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원글> 글라너란드(Glanerland) 레글러 산장(Leglerhütte)

최종 수정일: 2019년 7월 16일

산행 전에는 든든하게 먹어야지 하며 아침에 눈뜨자마자 계란을 삶기 시작했다. 평소에 잘 먹지 않는 치즈와 말린 고기도 상에 올리고 천도복숭아와 자두도 푸짐하게 씻어놓고, 눅눅해진 빵도 오븐에 살짝 굽고 꿀과 잼도 잊지 않고 아침상을 차렸다. 많이 먹다 보니 커피도 한 잔으로는 부족하다.


​아이와 시어머니와 진한 포옹을 나누고 집을 나섰다. 원래 아이와 함께 일박이일로 가려던 계획은 아이의 저조한 컨디션과 날씨 때문에 우리 부부만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걸로 바뀌었다. 아이는 산에 안 가고 할머니 집에서 사촌들과 함께 놀 수 있어 안심하는 눈치다.


​오늘 갈 곳은 글라너란드(Glanerland) 레글러 산장(Leglerhütte). 글라너란드는 알프스의 앞 산맥(Voralp)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융프라우 지역처럼 높지는 않지만 정상에 만년설이 드문드문 있고 지형이 아름다워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글라루스(Glarus)를 지나 차 한 대만 간신히 다닐 수 있는 좁고 꼬불꼬불한 산길로 들어섰다. 아무리 가도 케이블카를 타는 곳이 보이지 않아 계속 올라갔다. 산길의 한쪽은 절벽이었는데 차들의 전복을 방지하려는 의도로 보이는 길고 뾰족한 자연석을 군데군데 세워놨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보다 저 돌에 부딪치는 게 더 아프겠다, 산꼭대기까지 차로 올라가는 것 같은데 케이블카는 왜 타는 걸까, 사고라도 나서 우리 부부가 함께 죽으면 한국에 있는 우리 가족은 내가 죽었다는 것도 모르겠구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간 역에 도착했다.



케이블카 (Kies - Mettmen)

토요일 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한번에 스무 명까지 태울 수 있는 케이블카 두개가 번갈아 운행되어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다. 케이블카에서 내리자 아름다운 저수지(Garichtisee)가 우리를 반겼다.


Garichtisee

산장까지 가는 등산로를 살펴봤다. 왼쪽 길로 가면 2시간 15분, 오른쪽 길로 가면 3시간 20분. 남편이 어디로 갈까 하고 물어본다. 망설임 없이, 당연히 왼쪽으로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내려와야지! 했더니, 점심 빨리 먹으려고 그러지? 한다. 흠... 너무 오래 함께 살았다.


​케이블카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다른 등산로로 갔는지 우리가 가는 길은 한가했다. 길이 넓고 평탄하여 아이들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겠다 했더니 이게 웬걸. 한 시간쯤 지나자 돌길로 변하고 경사도 심해졌다. 아이를 데려왔더라면 많이 힘들었겠구나 생각하며 헥헥거리며 걷는데 누군가가 바람처럼 내 옆을 지나갔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그분의 뒤태에서 고수의 향기가 풍겼다. 일 년에 고작 두세번 산에 가면서 지인들에게 자랑하고 꼬박꼬박 산행까지 올리는 나 같은 애송이가 범접할 수 없는 진정한 산악인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고수의 향기가 스멀스멀

등산로 안내판에 쓰여있던 대로 딱 2시간 15분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탁 트인 분지에 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두막 수준이었던 산장을 2년 전에 다시 지었다는데 기존 산장과는 다른 자재로 지어진 모던한 건물이 산 한가운데에 나타나서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Leglerhütte (2273m)

메뉴판을 살펴봤다. 음료수 하나가 한국 돈으로 8천원. 헉~ 소리가 나올 뻔했지만 이런 곳에서 가격 불평을 하는 것은 백화점에서 명품 핸드백을 사면서 시장에서 콩나물 가격을 깎으려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헬리콥터로 운송할 텐데 가격이 비싼 거야 당연하지. 여기에 레스토랑이 없었다면 나는 과연 여기까지 이를 악물고 왔을까. 이런 곳에서는 가격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감사한 마음으로 먹자 하며 주문을 했다. ​


약7만원치 음식 -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다

이 커피의 이름은 Luusmeiteli, 개구쟁이 여자아이를 뜻하는 스위스 말이다.

식사 후 커피와 디저트는 필수. 산장 인심인지 레몬 케이크의 두께가 보통의 두 배다. 많이 걸었으니까 오늘은 다 먹어도 될 거야 생각하며 싹싹 먹어치웠다. 그리고 경치를 감상했다. 신선이 부럽지 않은 순간이었다.



​하산 중에 그림 같은 호수들을 만났다. 피졸(Pizol)에 있는 '다섯 개의 호수 하이킹 (5-Seen-Klassiker)'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Ängisee (해발 2012m) 풍경을 완성하는 강태공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기 전, 오늘의 일정을 마감하는 의미로 마지막 휴식을 취하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나는 아이스커피(스위스에서 냉커피인 줄 알고 이걸 시키지 마시길. 아이스크림에 에스프레소 커피를 섞고 생크림을 듬뿍 올린, 커피라기보다는 아이스크림에 가깝다.)를, 남편은 세가지 과일맛 아이스크림을 시켜 먹으며 다음에는 어디를 갈까 상의했다.


​저녁 7시쯤에 집에 도착했다. 아이는 이미 할머니 집에서 저녁을 먹었고, 남편은 밥 생각이 없다 한다.


​그렇다면!!!

​냉장고 깊이 숨겨놓은 열무김치를 꺼냈다. 한국에서 사 온 열무씨를 텃밭에 재배해 직접 담근 무공해 오가닉 경아표 김치.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음식 나눠먹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이 열무김치의 존재는 친구들에게도 적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큰 대접에 밥을 듬뿍 푸고 열무김치를 푸짐하게 올린 다음 고추장을 한스푼 넣고 참기름을 넉넉히 둘러... 쓱쓱... 아니다. 계란 프라이도 하나 올려야지... 완벽하다.


​한숟갈 듬뿍...음~ 바로 이 맛이다. 하루 종일 소시지며 파스타, 단 걸 많이 먹어 느글느글했던 속이 이제서야 화악 풀리는 것 같다. 익숙한 맛이 온몸으로 퍼진다. 이제서야 집에 온 느낌이다.


​잠깐... 산행기를 쓴다 했는데 계속 먹는 얘기?


​걷는 걸 좋아하고 산행을 즐긴다는데 어떻게 한결같이 둥글둥글 여성스러운 몸매를 유지하는지, 내심 궁금했지만 예의상 물어보지 못했던 지인들의 궁금증이 이 글로 해소되길 바라며 산행기, 아니 먹방기를 마친다.


*** 이 글은 객원 최경아님의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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