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부인

"미스 사이공" 은 한국인?

2019년 1월 14일 업데이트됨

영어버전 스위스 초연 프레스콜 통역 및 공연 관람 후기


오랜만에 통역 일을 다녀왔다. 뮤지컬이라는 화려한 세계의 커튼 뒤쪽을 살펴볼 기회도 얻었다. 미스 사이공의 여주인공 킴 역할을 한국인 배우 김수하 씨가 맡은 덕분이다.


쇼 비즈니스

오랜만에 통역 일을 다녀왔다. 뮤지컬이라는 화려한 세계의 커튼 뒤쪽을 살펴볼 기회에 더 구미가 당겼다. 올겨울 미스 사이공의 런던 웨스트 엔드 오리지널 프로덕션이 처음으로 스위스에서 공연하고 있는데, 본격적인 공연에 앞서 언론 대상 시사회가 11월 30일에 취리히 Theater 11에서 열렸다. 나는 배우 인터뷰에서 독일어 통역하는 일을 맡았다. 여주인공 킴 역할을 한국인 배우 김수하 씨가 맡은 덕분이다.


언론사들이 영상을 담을 수 있게 별도로 두 장면을 반복해서 2회 보여주고, 본격적인 공연에 앞서서 레미제라블의 작곡도 맡았던 원 작곡가 클로드 미셸 쇤베르크 (Claude-Michel Schönberg)까지 나와서 몇 군데 음악의 마지막 손질도 하는 꽤 긴장된 현장이었다. 오늘날 뮤지컬 계의 지형을 형성하는데 한몫을 한 원로 거장 앞에서 중년의 무대 총감독이 쩔쩔매는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났다. 어디 어떤 부분에 원래 톡톡톡톡 리듬이 있는데 왜 빠졌냐고 닦달을 하니까 „of course, of course „ 를 연발하며, 이리저리 오케스트라 피트와 영상 팀을 오가고 무전을 치면서 톡톡톡톡 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모든 대화는 뭔가 자만심이 스며든 아름다운 영국식 억양으로 정중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 속에서도 질책과 짜증과 당황과 안도의 모든 감정이 잘도 오고 가는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작곡가와 함께 리허설 무대를 무서운 집중력으로 함께 주시하는 제작팀의 엄청난 에너지가 뭔가 멋진 것을 함께 만들어 내려는 사람들의 정열이란 이런 것인가, 이것이 창조의 에너지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미스 사이공은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 등 장르 자체를 대표하는 작품들로 뮤지컬을 돈 되는 산업으로 성장시킨 걸출한 영국인 프로듀서 캐머런 매킨토시 (Cameron Macintosh)가 아끼는 자식으로 손꼽는 작품이라고 한다. 미스 사이공은 이미 많은 나라에서 여러 언어로 공연됐고, 2016년에는 25주년 기념 영화 버전이 개봉되기도 했다. 이제 27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베트남의 정치적 경제적 변화, 베트남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고, 그에 따라 작품의 성격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언론 대상 시사회 저녁에 프리미어 공연이 있었고 고맙게도 거기에 초대를 받아 전체 무대를 즐길 수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또 한국인으로 여성으로 이 뮤지컬을 바라보는 입장은 복잡미묘했다.





전쟁, 그 불멸의 주제


제작자 매킨토시는 자신의 성공비결을 전 시대를 관통하는 불멸의 명작이나 소재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꼽는다. 오페라 나비부인과 뮤지컬 미스 사이공은 1887년 프랑스 해군 장교이자 작가인 피에르 로티 (Pierre Loti)가 쓴 국화 부인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 세 작품 사이에는 만들어진 시대에 따라 커다란 시각적 차이가 존재한다. 원작인 국화 부인에서는 당시의 제국주의와 이국 여인에 대한 판타지, 오리엔탈리즘이 지배적이라면, 나비부인을 거슬러 미스 사이공으로 오게 되면 전쟁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과 그 속에서 고통받는 개인의 삶을 그리는데 집중하는 편이다.


미스 사이공이 전하는 주제가 여전히 시대성에 부합하고 오랜 세월에 거쳐 대중에게 큰 반향을 받아오고 있다는 사실은 전쟁과 그 속에서 학대받고 고통받는 여성과 아이들의 이야기가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고, 그래서 소위 돈 되는 불멸의 소재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미스 사이공의 이번 무대는 이런 주제를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밖으로 내세우는 반전이라는 메시지적 측면과 시각적 청각적 즐거움이라는 쇼 적 측면이 영리하게 결합하였다.


반라의 아시아 여성들이 꾸미는 현란한 쇼 무대와 미군을 상대하는 모습이 무척 자극적이어서 상업적인 부분을 이쪽에서 추구했다는 느낌은 버릴 수 없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 광란 속에서 관능을 무기로 처절하게 살아남아야 했던 그녀들의 춤사위에 어쩐지 가슴이 아려 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이 보잘것 없는 무기로 생존해가는 여성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 속에서 태어나고 남겨지고 버려지는 아이들의 고통스러운 운명은 또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한국의 근래 역사에서만 봐도 한국전쟁에서 베트남 전쟁에서 피해자로 가해자로 학대당하고 학대하고 아이를 만들고 고통을 물려주고 해 왔음도 사실이다.


사이공과 방콕 환락가의 쇼 무대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아시아 여성들의 관능적인 쇼를 즐기는 사람들은 사실 무대 위 미군 역할의 배우들이 아니라 무대를 마주 보고 앉은 관객이다. 그리고 그 관객의 대부분은 유럽인이다. 이런 구조는 무대 위와 아래의 경계에 반전이라는 형식적인 메시지가 얇은 막을 쳐 주고 있지만, 오리엔탈리즘의 교묘한 현존이라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게 한다. 뛰어난 노래 실력과 춤 실력 못지않게 아시아 여성으로는 한결같이 매우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배우들을 뽑은 것을 보면 뮤지컬 제작자가 전쟁이라는 주제를 쇼비즈니스로 승화시키면서 관객들의 시각적 즐거움을 채우는데도 빈틈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화려한 조명과 무대장치가 받쳐주는 쇼의 현란함, 주제의 무거움, 최고 기량의 배우와 무대를 만드는 창조적이고 영리한 사람들의 열정, 한국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생각들로 머리와 심장이 흔들린 복잡한 하루였다. 그래도 모든 것을 단순하고 편안하고 기분 좋은 결론으로 이끌어 준 이 가 있으니 바로 여주인공, 배우 김수하다.




김수하


25 살, 앳된 모습의 뮤지컬 배우이다. 단국대학교 뮤지컬학과 재학 중에 비디오 오디션을 통해 런던에 건너오게 됐다고 한다. 먼저 앙상블에서 연기하고, 킴 대역에 선발되고, 결국 메인 타이틀을 맡게 되었다. 한 단계씩 차근차근 성공스토리를 쌓아 온 셈이다. 그래서인지 런던 웨스트 엔드의 히트 뮤지컬 여주인공을 맡은 스타한테는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여전히 겸손하고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성격을 가진 배우이다. 요샛말로 배려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다음 인터뷰 팀을 기다리는 중에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통역자를 신경 써주는 여주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그가 무대에서 여주인공 킴 역할로 보여주는 가창실력과 연기력은 기술적으로도 나무랄 데가 없다. 순수한 외모와 기존의 킴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에 비해 맑고 또렷한 그의 목소리는 크리스 역의 남자배우가 가진 약간 두꺼운 소리와 합쳐지면서 킴 역할에 제격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무엇보다 완급을 조절한 다양한 감정선과 그 폭발력은 실로 압권이었다. 덕분에 거의 모든 기자들에게 그렇게 감정적인 장면들을 격정적으로 연기해내면 심리적으로 어려움이 없냐는 질문을 받았다.


무엇보다 내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그녀의 정열과 단호함이다. 한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보통의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아직 대화에서 영어가 완벽히 자유롭지 못하지만, 무대에서의 모든 영어 대사와 가사를 완벽하게 또렷하게 발음해 낸다. 심지어 일본판 미스 사이공에서도 킴 역할을 맡아서 모든 가사를 일본어로 소화했다고 한다. 그게 가능한 비결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냥 죽도록 연습 했단다. 단순해서 힘이 있는 대답이다. 뮤지컬이라는 세계가 그를 사로잡았고, 그곳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용기 있게 선뜻 또 한 발짝 앞으로 나가고 이루어 가는 그 젊은이의 삶이 참 치열하고 용기 있고 명확해 보인다.


복잡한 세계사와 전쟁의 치열함과 쇼비즈니스의 역설, 이 큰 그림들이 주는 모든 무거움을 뛰어넘는 단순하고 명확한 오늘을 사는 지혜는 „좋아서 하고, 그저 죽도록 연습한다“는 그 해맑은 대답인 듯하다. 단순해서 강력한 그의 성공비결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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