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부인

스페인 독감이 스위스를 휩쓸었을 때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 (Photo Credit: Cynthia GoldsmithContent Providers(s): CDC/ Dr. Terrence Tumpey/ Cynthia Goldsmith)

모두 죽는다. 그런데 뭐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그 대답은 단순했다. 그 때는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었던 «스페인 독감»으로 죽는 것이 가장 흔한 일이었다. 의학역사학자들은 당시 사망자 수를 전 세계적으로 2천 7백만에서 1억 명까지 추산한다. 총 5억 명 정도가 감염되었고, 이는 당시 세계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상상도 어려운 규모!

확실한 것은 1차 세계전쟁이 초래했던 엄청난 대량 살상의 규모보다 이 끔찍한 독감으로 죽은 사람의 수가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스위스가 받은 충격은 특별히 심했다. 두 세번 정도 독감이 크게 유행해서 약 150 만명 정도가 병을 앓았는데, 이는 당시 스위스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했다. 1918년 7월 에서 1919년 6월까지 24’449 명이 이 독감으로 사망했다. 20 세기 스위스에서 스페인 독감은 가장 치명적인 재앙이었던 것이다. 그 때도 길거리 잡지가 있었다면, «킬러 바이러스» 라고 불렀을 것이 틀림없다.


보라색 시체

스페인 독감은 직접적인 접촉이나 체액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일단 감염되면 증세는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열을 동반한 일반적인 독감 증세 외에도 환자는 얼굴 반점, 각혈 등을 겪고, 몸이 보라색으로 변하다가 마지막에는 고통스러운 질식증세를 보이며 죽어갔다. 보라색으로 변한 시체의 무더기가 거침없이 쌓여가는, 차마 믿기 힘든 비극이었다. 저명한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는 취리히 체류기간 중이었던1918년 10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피렌체의 페스트나 다른 유사한 역사적 사례를 모두 애들 장난으로 만들어 버리는 전 세계적인 전염병이다. 이 놈은 날마다 2만명에서 4만명을 잡아먹고 있다»


스위스에서 특별했던 점은 이 독감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정치적 요소를 띠게 된 것이다. 독감이 두 번째로 크게 번지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1918년 10월 말이었는데, 전국 총파업에 대항한 군동원 사태와 맞물렸다. 데모 군중에 대항해 투입되었던 군대가 명예로운 국방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독감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우파는 주장했다. 이들은 당시 러시아 혁명에 빗대서 좌파를 지칭하던 ´볼셰비키´라는 말을 사용하며 좌파의 탓으로 돌렸다. 예를 들어, 우어슈바이츠 신문 (Urschweiz Bote)은 «용감한 병사들 사이로 음흉한 적, 독감이 파고들어 소집해제나 제대 후에 귀가하는 병사들과 함께 각 가정에까지 숨어들었다» 라고 쓰고 있다. 독감으로 사망한 병사는 순교자로 대우받았다. 노동 조합은 이런 비난에 대항해 격분하며, 최악의 병영시설 수준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실제로 전국 총파업은 이미 첫 번째 독감 유행이 스위스를 휩쓸고 간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뿐 만 아니라 이 질병이 극에 달했던 곳은 데모 중심지와는 거리가 있었다. 예를 들어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칸톤은 옵발덴 (Obwalden)이었고, 우리 (Uri) 칸톤이 그 뒤를 이었다.



잘못된 이름

총파업과의 연계성 외에도 이 질병과 관련된 또 다른 오류는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 자체에 있는데, 이 독감은 스페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 것이 입증되었다. 중국 북부 지역에서 시작되어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군과 더불어 유럽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스페인에서 다수의 발병사례를 숨기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알폰소 8 세의 감염사실도 공공연히 발표했기 때문이다.


거의 대책이 없었던 의학계는 여러 가지 시도를 감행했다. 독감주사나 항생제는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마법의 치료제였던 아스피린이나 말라리아에서 효험을 보았던 키니네 (Chinin), 혹은 비소나 수은, 심지어 모르핀이나 헤로인까지 시험했다. 가정치료제로는 높은 도수의 술을 대량으로 마시는 방법이 널리 퍼졌는데, 전문가들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독감 확산을 누그러뜨릴 마지막 남은 한가지 방법은 최대한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었다. 공공 영역의 활동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학교, 연극 및 영화 극장, 시장과 교회가 임시 휴무 상태에 돌입했다. 그와 반대로 마스크와 소독제 판매, 관 제작 경기는 큰 호조를 보였다. 주로 학교가 임시병원으로 개조되었지만, 특히 유명한 개조사례는 취리히 톤할레 (Tonhalle) 공연장이 독감환자의 임시 수용소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유명인사 중의 독감 희생자로는 화가인 에곤 쉴레 (Egon Schiele),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 (Max Weber),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딸 소피 프로이트 등이 있고, 도널드 트럼프 현 미국 대통령의 할아버지 프레데릭 트럼프 (Frederick Trump)도 이 독감으로 사망했다. 이들과 반대로 스타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는 독감을 피하기 위한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냈다. 그는 파리에 있는 자기 아파트에서 꿈적도 하지 않고 들어 앉아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고 꼬냑을 마시면서 최악의 사태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참조 문헌

총파업, 1918년 11월 스위스: 출판사 hier + jetzt, 2018년, 바덴 출간

코렌, 니나 마리아: 1918, 19년 취리히의 스페인 독감, 2003년 박사논문

저자인 미카엘 반 오르수프 (Michael van Orsouw)는 역사가이자 자유기고가이다.

http://www.michaelvanorsouw.ch/


위 글은 Tagesanzeiger의 허가 하에 번역한 것이며 원본 링크는 다음과 같다. 원본 출처:

https://blog.tagesanzeiger.ch/historyreloaded/index.php/3582/die-pandemie-mit-mehr-toten-als-im-1-weltkri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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