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부인

여성 투표권: 스위스 남자들이 일부러 늑장부리던 시절 (2부)

1971년에야 여성 투표권 도입 저자: 토마스 마이센 (Thomas Maissen)원문 게재일: 2018년 8월 14일 (NZZ.ch)


(1부는 2월 18일자 기사에 있습니다.)



60 년 대에 분위기가 역전되었다. 스위스 서부지역에서 칸톤 차원 여성투표권이 도입된 후, 실제로 크게 바뀌는 것은 없음이 확인된 덕분에 반대파의 우려를 달랠 수 있었다. 또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유일한 구성원으로서 가족 수입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한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남자들도 점점 더 적어졌다. 1, 2차 세계 대전 사이 불경기 당시에는 기혼 여성의 취업에 대해,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에서 다른 가장의 기회를 뺏는 것으로 여겨 불공정 경쟁으로 간주하였지만, 전후 경기가 좋아지면서 가능한 많은 여성의 노동력이 요구되었다. 60년 대 피임약과 성의 혁명은 먼저 도시지역에서 성에 대한 이해의 변화를 불러왔는데 그 양상이 매우 빠르고 급진적이었다. 전에는 여자가 아버지라는 가장의 통제 아래 있다가 바로 남편의 보호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점점 결혼 연령이 높아지면서 여성이 혼자 살거나 주택임대 공동체 (Wohngemeinschaft)에서 살거나, 심지어 혼성 공동체 속에서 사는 일도 늘어났다. 스위스의 독일어권 지역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것은 오랜 동안 불법으로 간주되었으나 실제로는 동거도 공공연히 허용되었다.


정치적으로 볼 때, 이 새로운 삶의 방식은 기존의 전형적인 역할론을 타파했던 68년 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젊은 세대는 기성 여성단체들이 체제 순응적인 행동과 타협했다고 비난했다. 새로운 세대는 양성평등을 남성 시민들의 양보가 아닌 기본 인권으로서 요구했다. 새로운 여성 운동은 68년 운동의 저항 형식을 빌어 와 1969년 „베른을 향한 여성 행진“을 조직했다. 이들의 핵심 비판사항 가운데 하나는, 유럽인권협약에 성차별 금지 조항이 포함된 까닭에 스위스 연방위원회가 해당 협약을 단지 조건부로만 통과시키려 한다는 점이었다. 여성단체들의 저항은 의회에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연방위원회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법안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1년 2월 7일 스위스 유권자들은 621,109 (65.7 퍼센트) 대 323,882의 결과로 여성투표권을 수용했다. 투표율은 57.7%, 물론 이들은 모두 남성으로, 대다수 남성이 납득했음을 보여준다. 여섯 개 반의 칸톤이 법안을 거부했는데 대부분 농촌지역 카톨릭 칸톤들이었다. 찬성 비율은 제네바에서91.1 퍼센트였던 반면 아펜첼 인너로덴(Appenzell Innerrhoden)에서는 28.9 퍼센트에 불과한 등 편차가 컸다. 덕분에 아펜첼은 이후로 오랫동안, 심지어 외국에서도 스위스의 뒤늦은 여성참정권에 대한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 칸톤의 여성들은 전국차원의 선거권은 얻었으나 칸톤차원의 선거권은 없었다. 아우서로덴 (Ausserrhoden) 칸톤은 1989년 광장투표 (란츠게마인데 (Landsgemeinde): 유권자가 광장에 모여서 거수로 진행하는 직접투표)에서 매우 근소한 차이로 여성참정권을 통과시켰다. 인너로덴에서는 1990년 연방재판소에서 해당 칸톤의 헌법이 평등 원칙에 위배된다고 판결을 내린 후에야 저항을 포기했다.


광장투표를 시행하는 칸톤들의 이러한 저항은 직접민주주의가 여성투표권 도입을 더 어렵게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지지층 확산을 원하는 의회와 국민 정당들이 비교적 쉽게 여성과의 타협에 응할 수 있었던 반면, 스위스 남자들은 특권과 전통의 소멸을 끝까지 두려워했다. 실제로 니드발덴 (Nidwalden), 옵발덴 (Obwalden), 아펜첼 아우서로덴 등에서는 유권자 증가로 인해 전통적 광장투표를 위한 광장이 너무 협소해진 바람에 90년 대에 일반투표소 제도로 전환했다.


기존 정치 형태에 대한 집착은 권력 유지나 과거에 대한 향수에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위스 역사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유럽에서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주권이 국민에게로 옮겨 가고, 특정 기준에 해당되는 모든 국민이 시민권을 인정받는 자연권 원리가 우세하게 되는데, 이는 중앙 정부의 결정에 따라 쉽게 그 대상의 확대가 가능한 것으로 여성에게도 적용됐다. 그 반면 스위스의 전근대사에서 시민권은 자연권이 아니다. 스위스 시민권은 지역 게마인데를 기본으로 탄생한 것으로, 지금도 여전히 스위스 여권에 시민권 소유지를 기재하는 것 역시 여기에 뿌리가 있다. 게마인데 시민이 된다는 것은 자연권이 아니라, 하나의 특권으로 부모로부터 물려 받거나 다른 시민들의 투표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주민투표를 통한 외국인의 시민권 부여에 대한 논란은 이미 오래 이어 온 배경 스토리가 존재하는 셈이다. 단지 예전에는 이웃 게마인데에서 이사 온 사람도 외국인 취급을 받았던 것이 다른 점일 뿐이다.


시민으로 인정받기 위한 결정적인 기준은 자기 가족을 부양할 수 있고 민병의 일원으로 공동체를 수호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근대사의 공동체에서는 종교 역시 필수불가결한 공동 기본 가치관의 한 조건이었다. 이런 기준으로 종합해 보면, 경제적 자립이 가능하고 무장이 가능한 기독교인이 시민이 될 수 있었다. 게마인데, 칸톤 차원 그리고 1848년부터는 연방 차원에서도 확산 일로에 있던 투표권 자유화의 경향에 힘입어 아직 자립하지 못한 남자, 하인, 이방인, 전과자, 유태인, 빈민 등 점점 더 많은 남성 집단에 추가로 자연권적 성격의 시민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여성은 여전히 제외였다. 혼인법, 재산법, 상속법 등, 사법 (私法)에서는 남성인 호주가 여성 배우자의 보호자였고, 심지어 특정 칸톤에서는 1881년까지 미혼 여성이나 미망인이라면 무조건 한 명의 남성 보호자가 있어야 했다. 이제 주력이 된 시민층에서는 남편은 대외적으로 가족을 대표하고 부인은 집안일을 살피는 등, 부부 사이의 성역할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 밖에, 시민층의 부유한 여성들을 위해서는 교회, 학교, 복지, 미풍양속 같은 «여성적 성향의 영역»에 속하는 사안에 한해 참여를 허용하는 협회 부문이 생겨났다. 1885년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이런 공익 성격의 여성 단체들이 모여 최초로 상위 조직을 구성하기도 했다. 1968년에는 제네바 지역에서 마리 고에크-푸촐린 (Marie Goegg-Pouchoulin) 이 특히 시민권적, 경제적 차원에서의 여성 평등권을 추구하는 «국제 여성 협회»를 창설했다.


이때부터 적어도 학교위원회 및 개별 교회 차원에서는 여성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에 대한 요구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치 단체에서의 관련 요구는 좀 더 있다가 제기되었는데, 이런 시간차는 일종의 전략이기도 했다. 1880년 대, 메타폰살리스 (Meta von Salis_스위스 최초의 여성 역사학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는 같은 (납세) 의무에 대해 같은 권리를 요구하는 정치적 청원서를 작성했다. 1893년, 최초의 전국 단위 단체로서 스위스 여성노동자연합은 여성투표권을 요구했고, 1909년 이 목적만을 위한 별도의 협회를 설립했다. 이미 1900년에는 직업 및 경제, 종교, 문화, 공민 부문의 여성단체들이 함께 모여 스위스 여성단체 연맹이라는 상위 조직을 구성했다. 1999년 «알리앙스 에프 (Alliance F)»로 이름을 바꾼 이 단체는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 단체에서 다루는 사안들을 보면, 여성투표권은 여성계의 중간 목표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985년 새로운 혼인법이 통과된 것도 여성의 투표에 힘입은 것이다. 유급출산휴가 문제는 이미 1945년에 연방헌법에 포함되었으나, 실제적인 적용은 국민투표에서 여러 차례 고배를 마신 후 2004년에야 이루어졌다. 같은 노동에 대한 같은 급여, 여성관련AHV 규정, 여성에 대한 폭력문제 등은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주제이다.


윗글은 저자 토마스 마이센의 허가 하에 번역한 것이며 원본 링크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s://www.nzz.ch/schweiz/als-die-schweizer-maenner-sich-absichtlich-verspaeteten-ld.1412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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