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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 아버지가 존엄사 한 날

누군가의 존엄사를 지켜봐 달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어떤 옷을 입고 가야 하는 걸까? 나는 옷장 앞에 우두커니 서서 고민했다. 아무도 그런 상황에 적당한 옷이 무엇인지, 심지어 유명 패션 인플루언서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흰 단추가 달린 검정 셔츠? 분명 사람들은 "너는 장례식에 가는 사람처럼 입었니?" 라고 한마디씩 할 것이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어두운 파란색 폴로셔츠를 꺼냈다. "미니 골프 치러가는 길에 잠깐 들렀을 뿐이에요" 라고 대꾸하기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쓸데없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버지조차도 그 특유의 별 재미없는 말장난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 외에는 여느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회의도 흔들림도 없는 본연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존엄사를 결심했었고, 결심을 바꾼 적이 없다. 아버지는 스스로 삶을 끝낼 것을 선택했고, 자신의 몸을 갉아 먹고있는 암도 끝장낼 것이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고집으로 내 저항심을 부추겼다. 하지만 오늘 나는 그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우리 모두 식탁에 앉았다. 아버지는 마지막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어제 어머니와 보낸 마지막 밤에 관해 이야기하셨다. 아버지는 일찍 잠들었다고 하셨다. 심지어 어머니와 함께 저녁 의례 행사처럼 하던 스크램블 보드게임도 하시지 않았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또 내 반항심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 같으면 차라리 예전에 듣던 음악을 레코드판에 올려놓거나, 사진첩을 보거나, 비록 밤새 어떤 영화를 볼지 고를 수 없었을지라도 놓쳤던 영화를 볼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인생에 대해 이야기 하거나 턱없이 비싼 와인을 마시거나 뭐가 좋았었는지, 뭐가 개떡 같았는지 내 인생을 총결산해 볼 것이다. 아니면 인생에서 놓친 절호의 찬스들에 대해 한탄할 수도있다.

<야단법석 떨지 마>

하지만 아버지는 피곤했다. 어제 오후 자식들과 손주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전부 다 여기 모여있었다. 아이들은 경건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늘 그렇듯이 소란스러웠고 할머니의 장난감이 쏟아져 나왔다. 둘째 아이가 오래된 양말이라도 좋으니 할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는 뭔가를 가지고 싶다고 말한 그 순간 우리는 우리가 왜 여기 모여있는지 다시 깨달았다.

조금 뒤 아버지는 우리가 찾아온 것이 얼마나 기쁜지 말씀하셨다. 스스로 존엄사를 선택하는 것이,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나는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이미 모든 일을 처리하셨다. 형제들과 지인들에게 아버지의 결정을 알렸다. 신이 해야 하는 일을 아버지가 잘못 건드리고 있다는 주위의 비난은 아버지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미 60년 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포기했었다. 고인의 유해를 지키기 위해 밤샘을 하거나 추도식 또는 장례식과 같은 의식으로 "야단법석 떨지 마" 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본인의 재가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나무 밑에 뿌려지길 원하셨다.

엑시트(EXIT)에서 하인즈라는 여성이 1분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도착했다. 존엄사 진행 과정을 들은 집사람은 "스위스 사람들은 죽을 때도 정확하네" 라며 비꼬았다. 하인즈 씨는 관청이 존엄사를 처리할 시간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검사는 시체의 이상 유무를 판정할 것이다. 이 일을 수년간 해오고 있는 하인즈 씨는 아주 차분했다. 하인즈 씨는 내가 고민하는 것을 이미 안다는 듯 아버지를 보면 치명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화학치료, 방사선 치료, 심한 진통제가 그를 늙게 했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여전히 아주 작은 에스프레소 커피잔 뒤에 앉아 있는 부처처럼 보였다.

되돌릴 없는 순간

이런저런 대화가 오간 뒤 하인즈 씨는 존엄사에 사용되는 약물이 독하기 때문에 위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며 구토 방지약을 먹어야 할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그 전날처럼 나는 내 가족이 자랑스럽다. 어느 누구도 아버지만을 특별히 여기지 않았고, 아버지에게 지나치게 집중하거나 아버지를 순교자로도 만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것들을 죽도록 싫어하셨다. 아버지가 너무 고집불통일 때는 우리가 항상 그랬듯이 아버지에게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단지 45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한 어머니만이 아버지의 고집불통 행동을 어느 정도 눈감아 주었다.

진정제가 서서히 효과를 보이자 우리는 부엌에서 나왔다. 안락사에 사용되는 약물인 나트륨 펜토바르비탈 가루약이 든 약통을 여는데 잘 안 열렸다. 하인즈 씨는 새로 나온 약이 뚜껑 열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나는 내용물을 조금도 흘리지 않고 뚜껑을 열었다. "지금 절대 손가락을 핥지 마세요."라는 하인즈 씨의 뻔한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우리는 침실로 들어갔고, 아버지는 모두에게 몇 단어로 아주 짧게 작별 인사를 하고 포옹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거의 반세기 동안 함께 살아온 어머니를 조금 더 오래 안았다. "잘 지내." 아버지는 침대에 앉았고 아버지를 지지하기 위해 두 명이 양쪽으로 엄호를 했다. 하인즈 씨는 아버지에게 흰 가루약이 녹은 컵을 건네주었다. 아버지가 직접 마셔야한다. "이걸 마시면 이제 더는 되돌릴 수 없어요" 라고 하인즈 씨가 말했다. 아버지는 살짝 주저했지만 두 번 만에 다마셨다. 온몸을 떠시면서 약이 정말 지독하게 쓰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약물에 대해 미리 안내를 받았지만, 그 쓴맛에 대해서는 놀라신 것 같았다. 입가심할 시럽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침대보를 바라보았다. 평범하면서 화려한 색을 띤 몬드리안식 무늬였다. 어머니가 의도적으로 이런 침대보를 입혔을까? 확실하다. 아버지가 손 인사를 하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갑자기 "이제 시작이다" 라고 하셨다. 우리는 더 이상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의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졌고 호흡도 점점 더 차분해졌다. 그리고 부고하셨다.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기

"깊이 잠드셨네요, 벌써 멀리 가셨어요" 라고 하인즈 씨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버지에게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내가 아버지 옆에 앉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지난 35년 동안 가지고 있었던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 같았다. 한번은 할머니께서 나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에 대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단다" 라고 말씀한 적이 있다. 나는 할머니의 말씀이 아주 오래된 츠빙글리식 대화 거부이자 앞뒤가 꽉 막힌 폐쇄적인 생각으로 간주했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나도 그러니까. 우리 중에 누구도 운명에 대해 불평하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신을 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도 페이스북에 무수한 슬픈 이모티콘을 사용한 글을 남기지도 않았다. 그냥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래서인지 아무도 코비드 19일 수도 있는 내 감기 증상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것이 무엇인지 분명했다. 어떤 큰 제스처도 없이 그리고 눈에 띄는 동요도 없이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그러나 우리는 내심 동요되었다.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있다. 호흡은 멈췄다. "산소가 없어질 때까지 심장은 여전히 뛰어요" 라고 하인즈 씨가 말했다. 나는 순간 촛불이 타들어 가면서 점점 약해지고 사라지는 이미지가 떠 올랐다. 하인즈 씨가 왜 창문을 열라고 나에게 요구했는지 지금은 알 것 같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혼이 다음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영혼은 가버렸다. 아버지의 손에서 시작해 얼굴로 이어지면서 피부색은 연하게 변했다. 아버지의 얼굴은 편안하고 한없이 고요해 보였다. 반면 나는 떨면서 "아버지가 평화를 찾으신 것으로 보여요" 라고 말했다.

이별의 존엄성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즈 씨가 전화한 경찰관 두 명이 왔다. 젊은 경찰관과 나이 많은 경찰관은 사건 경위를 보고 받은 뒤 식탁에 앉아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젊은 경찰관은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그는 조사해야 할 특이한 사망 사건이 있어서 여기에 왔다고 설명하면서 어머니와 여동생은 쳐다보지도 않고 내 눈만 바라보았다. 나는 하마터면 <이봐요, 경찰관이 지시를 내리던 시대는 끝났어요>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찰관들은 우리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 때문에 온 것이다. 아버지라면 이런 사람들과 쉽게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행정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은 경찰관이 도착하자 시작되었다. 시간을 초월한 것 같은 붕 뜬 듯한 상태도 끝났다. 관청에서 나온 사람들은 신속하고 친절하게 일을 처리해 나갔다. 나는 피자를 주문하는 새로운 임무를 맡았다. 우리는 지난 며칠 동안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이제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음식을 배달하는 사람이 관을 들고 나가는 사람들과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품위 없는 행동은 방지할 수 있다. 작별의 존엄성은 지켜져야 한다.

하루 뒤 나무에 등을 기대어 딸아이가 놀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가을 햇살에 내 영혼을 비추고 있었을 때, 그제야 수개월 간 나를 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무거운 짐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기에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부모님이 아버지가 병으로 인해 겪는 고통의 대부분을 우리가 모르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고있다. 참을 수 없는 고통과 폐에 물이 차올라 물을 빼야 했던 수많은 밤들. 이런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이 나쁜 소식만을 전할 때면 받았던 실망감.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게 위안이 된다. 나도 선택할 수 있게 된다면 모든 것을 느끼고, 완전한 의식 상태에서 열린 마음으로 죽음에 다가서고 싶다.

위 글은 Tagesanzeiger의 허가 하에 번역한 것이며 원본 링크는 다음과 같습니다. 원본 출처: https://www.tagesanzeiger.ch/machs-gut-wie-mein-vater-mit-exit-starb-747233170553

Matthias Schüssler, Tages-Anzeiger, 23.09.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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