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부인

1918 스위스 총파업 덕에 파리는 어부지리

2019년 1월 14일 업데이트됨

스위스가 볼셰비키 혁명의 발화점이다? 이 주장으로 프랑스는 베르사유 조약 유치에 성공했다.


요새로 변한 연방청사: 군인들이 총파업 기간 중 연방의회를 지키고 있다. 사진 출처: 스위스 연방 문서고 (common domain)

1918년 11월 9일에서 14일 6일 동안 스위스는 근대 연방국가 역사 속에서 전무후무한 충격 속을 지나고 있었다. 1914년 이후 오랜 전쟁을 겪으면서 국민의 실급여액이 4분의 1 가량 줄었고, 광범위한 계층의 국민들이 가난을 겪었다. 1918년 여름에는 전국민의 6분의 1이 정부의 비상지원에 의존하는 판국이었다. 그에 반해 기업가들은 전쟁 덕에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극심한 불균형으로 사회적 긴장이 커져가는 상황이었다. 1916년부터 공장 파업과 데모가 늘어갔다.


1918년 가을에는 1차 대전이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고, 그에 따라 스위스 군의 국경투입 임무도 끝나가고 있었다. 상황은 모순적이었다. 평화에 대한 갈망이, 그리고 전시 복무를 끝내고 귀가를 원하는 군인들의 욕구가 커지고 있었고, 미국산 곡물수입으로 식량부족사태 완화가 기대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수입곡물 관리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연방위원회는 이 곡물을 사회적 불균형 해소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노동운동 및 여성운동계에서는 전쟁말기의 이 시점을 개혁의 순간으로 보고, 여성투표권이나 8시간 근무제 등의 요구사항을 관철하려고 시도했다. 더불어 좌파는 부자세를 통해 전쟁부담을 공평하게 분담할 것과 연방정부 의석을 요구했다.


노골적 도발

군 지도부는 긴장이 악화된 상황을 고려하여 무장군 개입을 주장했다. 울리히 빌레 (Ulich Wille) 장군은 11월 4일 연방각료이자 국방부 장관인 카밀 데코페 (Camille Decoppet) 앞으로 보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류에게는 범죄가 발생하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범죄현장에서 범인을 덮치거나 그 후에 목을 다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 이미 총파업과 혁명 발발의 확실한 징후가 나타난 후에 군대를 파견한다면 이미 너무 늦었다.“ 예방적 선제 공격을 이보다 더 단호하게 주장하기도 어려울 것인데, 실제로도 그 주장 대로 진행됐다. 취리히 정부의 요청에 따라 연방정부는 기병대와 보병대를 제공했다. 11월 6일 취리히는 군대가 장악했다.


사회민주당과 노조가 연합해 결성한 올튼 행동위원회 (OAK_ Oltener Aktionskomitee)는 „대규모 투입 군대“를 „노골적인 도발“으로 규정했다. 궁지에 몰린 것이다. 이런 명백한 도발에 대해서도 별다른 대응을 않는다면 OAK는 종이 호랑이가 될 판국이었다. 11월 9일 위원회는 일단 24시간 항의파업을 촉구했는데, 곧 상황에 대한 규제 능력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왜냐하면 취리히 노동자연합이 그 결정에 한 술 더 떠서 일련의 요구조건이 충족될 때 까지, 특히 군대가 퇴각할 때까지 항의 파업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관대한 호의로»

이렇게 갈등은 첨예화되었다. OAK는 떠 밀리듯 앞에 나서야 했고, 11월 12일 무기한 전국 총파업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초기에 주저하는 듯했던 철도 부문까지 포함해 총 25 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돌입했다. 이들 앞에는 곳곳에서 기관총으로 무장한 총 9만 5천명의 군인이 가로막고 있었다. 취리히 주둔군 사령관 에밀 존더에거 (Emil Sonderegger)는 11월 11일 소위 „수류탄 명령“을 통해 전면적 대립이 발생할 경우 군대는 무기를 사용할 것을 명백히 하였다.

연방위원회는 11월 11일 연방의회 임시회를 소집하였다. 그라우뷴덴 출신의 연방대통령 펠릭스 칼론더 (Felix Calonder_자민당)는 다음날 연방의회를 개막한 후, „파렴치한 선동가들과 명백한 볼셰비키 테러의 대리인들이 스위스 내에서 폭동의 토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거듭 비난했다.


하지만 이런 장광설 뒤에 곧 유화적 어조가 뒤 따랐다. „현재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관대한 호의를 가지고 최대로 성실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민들의 사회적 문화적 처우개선 보다 더 중대한 과업은 없다“라고 강조했다. 칼론더 대통령은 또한 „연방정부 집행위원회의 구성원 수를 조속한 시일 내에 9명으로 늘려서, 이 정당 (사회민주당)의 당수가 연방정부의 업무와 책임에 동참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민당 출신 연방각료 에드문트 슐테스 (Edmund Schulthess)가 이러한 화해의 노선을 측면 지원했다. 그러나 전체 연방위원회와 의회의 대다수는 여기에 어깃장을 놓으며 강력한 진압을 주장했다. „오늘 항복은 영원한 항복이 될 것“이라고 취리히 출신 정치가 프리츠 보프 (Fritz Bopp)는 말했다. 11월 13일 OAK에 무조건적인 파업 중단에 대한 요구가 공식적으로 전달되었다. 시민전쟁의 상황까지는 원치 않았던 파업지도부는 손을 들었다. 그러나 OAK의 뛰어난 수장인 로베르트 그림 (Robert Grimm)은 사실 항복에 반대표를 던졌었다. 그로서는 사회정치적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했다고 하는 정부가 양보를 위한 노력을 않는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총파업 기간 중 취리히 파라데플랏츠에 주둔한 기병대, 작자미상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혁명의 장소?

연방위원회가 그토록 강경한 노선을 고수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흥미로운 점은 구스타베 아도르(Gustave Ador_자민당)와 쥬세페 모타 (Giuseppe Motta_보수국민당) 등의 두 연방각료는 11월 13일 파업지도부의 그림(Grimm)을 향해서 스위스에서 혁명이 발발할 경우 연합군의 개입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 사실이다. 사실 그러한 준비가 실재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진 자료가 없지만, 아마도 정책결정권자들의 머리속에서는 실제로 이런 시나리오가 오가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프랑스는 스위스를 혁명 책동의 발화점으로 간주했다. 연방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1918년 11월 초 프랑스 대사는 스위스 연방대통령에게 볼셰비키가 스위스에서 출발하는 혁명을 구상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고 한다.


프랑스가 스위스를 기점으로 하는 혁명의 위험을 과장해서 다루었던 데는 확실한 이유가 있다. 1918년 가을 미국의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대통령에게는 코 앞에 닥친 중대한 평화조약이 중립지역에서 체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0월 28일 미국 협상단 대표인 에드워드 하우스 (Edward House)에게 파리가 괜찮긴 하지만 로잔이 더 나은 것 같다는 내용을 전보했다. 하우스 대표는 11월 2일, 평화조약 회의가 로잔이나 제네바에서 개최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전달했다. 또 11월 5일에는충분한 숙소 확보가 가능한지 미국이 회의장소에서 전화 및 전보시설 설치 권리를 확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스위스 연방위원회 측에 문의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11월 7일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된다. 윌슨은 „한 번 더 숙고한 끝에“ 스위스보다는 역시 베르사유가 나은 것 같으며, 그 이유는 스위스가 „모든 독성 요소에 물들어 공공연히 적의 영향을 받고 있는“ 까닭이라고 설명했다. 11월 9일 하우스는 조지 클레먼소 (Georges Clementceau) 프랑스 총리와의 회담 내용을 보고하면서, 제네바가 아니라면 어떤 장소라도 찬성할 생각이며 필요하다면 런던으로 오겠다고 전했다. 스위스가 제외된 후 후보지가 확실해진 까닭에 그의 런던 여행은 필요 없었다.


스위스에 대한 윌슨 대통령의 인식

이러한 과정은 스위스 총파업 이전의 상황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11월 5일 결정되어, 11월 12일과 13일 철도 운행중단 중의 혼잡한 상황에서 집행되었던 주 스위스 소련대표부의 추방 사건 역시 평화조약을 둘러싼 힘겨루기의 상황과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확실히 프랑스 정부가 스위스보다 혁명에 대한 공포를 더 잘 이용한 것이다. 연합군 측의 비판이 연방각료 아도르를 더욱 불안하게 한 것은 그가 사실 국제연합의 제네바 유치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좌절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19년부터 개인 자격으로 여러 차례 파리를 방문했고, 이미 연방각료에서 물러났던 1920년 봄에는 런던도 다녀왔다. 기본적으로 아도르는 사회정책적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단지 우파에서 볼세비키와 동일한 노선이라고 몰아 갔던 총파업을 (실제로는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추후 입증) 차단하여 대외적으로 효과적으로 어필하려는 것이었다. 이로써 그는 윌슨 대통령의 스위스에 대한 이미지를 전환하기 위해, 신뢰감을 주는 “안정과 질서” 라는 신호를 서방에 전달할 수 있었다.


그는 목표를 이루었다. 안정과 인류애의 보금자리, „소국 속의 국제연대”로서의 이미지를 되찾은 중립 소국 스위스는 1914년 이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국제기구 및 국제회의 소재지로서의 매력적인 입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타게스안차이거 (Tages-Anzeiger), 원문 게재일: 2018년 10월 30일, 18:16

https://www.tagesanzeiger.ch/schweiz/standard/im-landesstreik-lag-weltpolitik/story/19552626


기사 작성자인 야콥 타너 (Jakob Tanner)는 루체른 출신으로 1997년에서 2015년까지 취리히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전공은 근대사 및 스위스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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