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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여름특집-그곳에 가고싶다> 백두산 천지연

대학을 졸업하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영국을 거쳐 2012년 다시 한국에 왔다. 그러고 보니 서양의 언어가 중요한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서 서양을 마음 속에 담아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들을 가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서울에서 계약직을 마치고 여기저기 인터넷으로 지원서를 내면서 남는 시간을 이웃 나라에서 보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오사카에 있는 친구들과 만나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바로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베이징에는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딱 12시간을 만났던 인연이 있었다. 한국과 이탈리아 16강 전이 열렸던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나에게 누군가가 아담하고 미국식 영어를 쓰는 중국인 대학생을 데려왔다. 경기가 끝나고 자정이 다 된 시간에 대전 반대편에 있는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서울행 버스를 타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자정에 오갈 데도 없는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가 중국인이라고 울 엄마는 다음 날 아침 식사로 짜장밥을 해주셨는데,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이지만 달곰하고 맛있다던 그녀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영국은 왕실이 중요한 관광 상품이듯, 공산당은 중국의 주요 관광 상품이다>



<북경대학 앞에는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규모의 자전거 주차장이 있다>



미국 유학생이었던 그녀와 이메일로 인연을 이어가다 십 년 만에 베이징에서 만났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대륙 시리즈 사진과는 다르게 베이징 번화가는 한국 대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침을 해 먹지 않거나 사 먹는 경우가 많다는 친구의 말처럼 베이징 시내 어디에나 아침 출근 시간에는 노점으로 반짝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친구네 집 앞에 직화구이 버거를 파는 상인에게 거의 매일 아침을 사 먹었다. 천안문과 베이징 대학, 만리장성, 박물관 등등 유명 관광지는 며칠이면 충분했다. 친구에게 며칠 백두산에 다녀오겠다 했다.


<중국식 빵에 제육볶음과 계란, 상추를 끼워 파는 노점>



베이징에서 백두산에 가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베이징에서 연길역까지 가는 25시간짜리 기차를 타야 했다. 우선 베이징 시내에 있는 장거리 기차표 상점에서 여권을 보여주고 기차표를 예매했다. 2012년 당시에 편도 330위안 (약 5만 원)이나 하는 3등칸 기차표는 중국 서민들에게 부담이 되는 가격이라 했다. 중국 전국으로 연결되는 베이징역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목적지에 따라 들어가는 문이 달랐고, 표가 없이는 입장이 불가능했다. 베이징에서 정오에 출발한 기차는 연길역에 다음날 오후 한 시 도착 예정이었다.



<북경 - 연길 기차표. 가짜표 구매를 방지하기 위해 5위안짜리 복권을 함께 끼워 판다>


유럽에서 타는 3등칸 침대 열차처럼 한 칸에 여섯 명이 앉고 누워 잘 수 있게 되어있는데, 유럽과는 다르게 침대를 접을 수가 없고 칸마다 문이 없다. 그러니까 기차 열량 하나 전체가 복도로 뚫려있는 셈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두꺼운 책 한 권을 다 읽을 요량으로 가장 저렴한 맨 위 칸으로 예약했다.



<각자의 사정이 빤히 보이는 거리의 여행객들, 코로나 시국에는 어떻게 운영될까>



기차는 승객으로 꽉 찼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조용하고 깔끔했다. 두 명의 직원이 몇 시간 단위로 교대하며 기차 내의 위생 상태와 질서를 검사했고, 예전 한국의 기차에서 목소리를 꺾어가며 음식을 팔던 그런 판매원이 종종 왔다 갔다 했다. 중국의 기차 판매원도 목소리를 꽤 꺾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었고, 멀리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면 승객들이 돈을 준비하고 그랬다. 맨 위쪽에서 앉지도 못하고 계속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팔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누워있는 아줌마가 이런 여행길에는 먹는 게 최고라며 부추와 계란이 들어간 빵을 나눠줬다. 내 침대 아래에는 젊은 아빠가 서너 살 정도 된 딸래미와 여행 중이었다. 그 아이는 나를 "아이 아이" (이모)라 부르며 잘 따랐다.



<맨 윗 칸은 음식 구경,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얼마나 잤을까. 기차가 정차하는 움직임에 눈을 뜨니 밤새 기차는 멀리도 왔나 보다. 허허벌판과 아직 개발되지 않은 시골의 모습이 반복되었다. 그러고 얼마 되지 않아 정차역 안내방송이 '조선말'로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족 자치주로 기차가 들어온 것이었다. 오후 한 시가 되자 기차는 정시에 연길역에 도착했다. 베이징역과는 판이하게 작은 역이었지만, 연길역도 규모가 못지않았다. 역전에 나서자마자 '조선말'로 된 간판과 광고가 즐비했다. 더듬거리지 않아도 말이 통하는 곳에 온 것이다.



<연길 기차역>



<연길 시내 버스 광고>



<북한식의 단어에 궁서체로 쓰인 주요 건물 간판은 마치 북한에 온 듯 했다>



<LA 갈비와 북한식 냉면을 파는 가게가 인상적이었다>



기차역에서 민박 주인아저씨를 따라가 우선 짐을 풀었다. 조선족이라는 그는 마흔이 넘어 아들을 하나 어렵게 얻었다 했다. 아파트의 외관과는 다르게 집 내부는 밝고 깨끗했다. 여섯 살이나 되었을 법한 아들은 뽀로로와 타요 장난감이 제일 좋다 했다. 한국에서 온 손님에 익숙한 아이는 이번에 온 이모에게 관심이 참 많았다. 나는 열심히 대답했고, 아이의 엄마는 이모를 귀찮게 하지 말라 했다. 짐을 풀고 길림 시내를 둘러봤다. 조선족 자치주 60주년이 되어 여기저기에서 큰 행사 준비와 공사가 한창이었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사진을 모신 가게들과 한류 물품을 파는 가게들이 뒤섞여 있었다.


<조선족 자치주 60주년을 맞아 공사가 한창이었다>



<한류 열풍을 타고 한국식 옷가게나 한국 연예인 사진이 걸린 곳이 많았다>



<김일성 사진을 모신 가게는 말을 걸지도 않는게 상책이라고 민박집 아저씨가 일려줬다>



<연길 시내 서점에는 조선족 작가들의 책들이 꽤 많았다>



민박 아저씨가 어렵게 예약해 준 백두산 관광버스는 내국인 용이었다. 5월에 갔던 터라 아직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 관광 시즌이 아니었다. 길림역 앞에서 새벽 네 시에 미니버스 한 대가 관광객을 가득 채우고 출발했다. 북한 김정은과 비스름하게 생긴 가이드는 외국인을 데려오면 어쩌냐며 민박 아저씨에게 난색을 보였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팅 동 이디엔" (조금 이해해요)를 반복했다. 그 말과 "칭 피엔이 이디알 (싸게 해 주세요) 정도로 이미 베이징에서 일주일을 살아남은 쥐꼬리만 한 자신감이었다.



<두 시간을 달려서 6시에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친절한 이중 언어 간판>



<패키지 여행에는 꼭 상점을 들리기 마련이다>





미니버스는 몇 번의 고려인삼 상점을 들러 백두산에 도착했다. 아직 관광 시즌이 아니라 공사 중인 구간도 많았고,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던 화장실도 몇 군데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발발 떨며 시작한 여정에 운전사 뒤에 혼자 앉은 젊은 여자가 궁금했던 부부가 자꾸 먹을 것을 건네줬다. 몇 마디를 주고받으면서 내가 한국에서 혼자 왔다는 것을 알고는 자기들과 꼭 붙어 다니라고 신신당부했다. 흑룡강에서 왔다는 그 부부는 점심 도시락을 받을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천지연에 올라갈 때도 나를 꼭 데리고 다녔다. 백두산에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밤새 달려왔다고 했는데, 아내분은 놀러 가는 길이라고 집에서부터 머리에 젤을 잔뜩 바르고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왔다 했다. 아주머니와 화장실에서 나오는 길에 핸드크림을 바르면서 아주머니에게도 조금 드렸더니, 아저씨께서는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들 피부가 좋은 이유를 알겠다'고 하셨다.


<아주머니는 멋진 가죽 잠바를 포기하고 결국 두꺼운 잠바를 꺼내 입으셨다>



<이 많은 관광 수입의 기회를 중국에게 넘겨준게 안타까웠다>



몇 번의 버스를 갈아타고 드디어 꼭대기에 도착했다. 고지는 저 멀리 보이지만, 스위스 알프스처럼 걸어도 걸어도 한참이 남았다. 꼭대기만 쳐다보며 얼마를 걸었을까, 드디어 천지연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마오쩌둥인가 장쩌민이 세 번을 갔어도 날씨 때문에 못 봤다는 천지연이 화창한 햇살 아래 저 너머 북한 쪽까지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몇 년 전 문재인 대통령이 천지연 물을 뜨는 모습과는 다르게 중국 쪽은 매우 가파른 절벽이었다. 북한과 산둥성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다 맞아가며 울타리에 조심조심 지지해가며 좁은 곳에서 사진을 찍어야 했다.



<동행한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겨우 사람들을 비집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춘천에 사는 언니네에서 그렇게 가까운 북한을 먼발치에서라도 볼 수 없는 남한 국적의 나는 이렇게 멀리 돌아와 중국 쪽에서 천지연을 넘어서나 북한을 볼 수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북한을 보고 싶어서 베이징으로 돌아가는 일정을 하루 미루고 연길시로 돌아오자마자 도문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도문은 연길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중국어로 '도문강의 별'이라 적혀있다>



도문은 두만강을 접한 동네 이름이다. 두만강의 중국식 이름인 "투먼"의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도문이 되어 '조선말'로 도문이라 통용한다. 도문은 아주 작은 읍네 같은 동네였다. 작은 장이 열리고, 택시를 타면 오 분 내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동네 이정표를 따라 얼마를 걸으니 두만강이 나왔다. 두만강을 따라 호텔도 있었고 식당도 있었다. 음식을 사 먹고 잠을 잘 수 있지만, 강을 따라 사진 촬영은 절대 금지한다는 푯말이 붙어있었다. 대전 유등천처럼 얕고 넓은 개천 같은 모습의 두만강이 중국과 북한의 경계였다. 밤이 되면 누군가가 그 강을 건너다가 목숨을 잃기도 하는 곳이었다. 그 위로 난 다리는 이쪽과 저쪽이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 다리 건너 보이는 동네의 집과 건물들은 보여주기일 뿐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언덕 너머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 그랬다. 이 모든 것은 쉬쉬하며 나누는 이야기라 했고, 그 이야기가 누구에게서 어떻게 나갔는지는 아무도 몰라야 한다고 했다.


<도문에서 북경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작년 첫 번째 록다운 때 '사랑의 불시착'이 삶의 활력소가 되었었다. 북한이 더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같은 말과 같은 문화를 따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그런 메시지를 전달한 점도, 재미있는 이야기 구성도 참 좋았다. 그리고 드라마를 보면서 남한과 북한이 공존하는 중국의 조선족 자치주가 떠올랐다. 한반도 어귀에서 한 세기가 넘게 말과 문화를 이어가고 있는 조선족이 우리가 잊고 있는 역사의 한 부분을 매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백두산 관광 마지막에 들른 조선족 마을에서 본 북방식 온돌 가옥과 윤동주 시인이 태어났다는 용정을 지나면서 고등학교 지리 시간과 문학 시간이 다시 떠올랐다.



<조선족 시범 마을에 들렸다. 통역 없이 읽고 알아듣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북방식 온돌. 부엌과 방이 합쳐져서 열을 최대한 한 공간에 가두기 위한 형태이다>



맨해튼과 에펠탑은 가 봤어도 내가 나고 자란 한국의 이웃 나라 여행은 처음이었는데, 거기서 한반도의 역사와 이면을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었다. 지척에 그런 곳들을 두고 나는 미국으로 영국으로 유럽으로 대중매체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유명 관광지를 동경하며 여행했었다.


언젠가 다시 기회가 된다면 내가 이해하는 말로 다닐 수 있는 조선족 자치구와 백두산, 그리고 고구려의 흔적을 찾아가 보고 싶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회원국 모임에 남한과 북한이 만장일치로 들어가게 되었다니, 언젠가는 취리히에서 모스크바로,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블라디보스톡에서 백두산을 잠시 들렸다가 기차를 타고 대전에 친정 부모님을 뵈러 갈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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